J는 그의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언제나 가위에 눌렸다. 어릴 때에는 악몽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가위 자체를 악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이를 좀 먹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의 악몽에는 몸이 쑥 꺼지는 느낌과 몸이 마비되는 감각, 누군가가 자신의 위에 누운 것 같은 답답함이 동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소위 '가위눌림'이라고 부...
계금이 눈을 뜬 것은 해가 서산을 향해가고 있을 때였다. 지밀 내인이 되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비번일 때 한나절을 자더라도 타박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궁이 바쁠 때에는 비번이어도 일손을 도와야 했겠지만, 요즈음에는 궁중 행사가 거의 없었다. 계금은 앞으로도 이런 날이 쭉 이어졌으면, 생각했다. 한 시진은 더 자도 괜찮았지만 계금이 눈을 뜬 이...
"너희 집 오면 무슨 빈 집 온 것 같아." K는 거실에서 한참 서 있더니 그렇게 말했다. "빈 집 맞지 뭐. 한 달 중에 반은 야근에 철야인데." 화장실에서 막 나오던 C는 그렇게 대꾸했다. C가 다니는 출판사는 마감 직후가 아닌 이상 매일 격무를 보장하는 곳이었다. 마감이 끝나면 다시 마감이 시작된다며 자조하던 면접관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걸 미리 알...
우리 아버지는 등신 같은 갱단의 뒤처리를 해주다 대낮의 길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아직도 그 일이 정확히 뭐였는지는 모른다. 아마 마약 운반 비슷한 거였으려나 추측할 뿐이다. 사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가끔 내 배가 아플 정도로 웃도록 나를 간지럽히던 모습 정도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웃음이 없어졌다. 안 그래...
저는 야경을 싫어해요. …네, 이상하죠? 저도 알아요. 보통 다들 예쁘게 생각하니까. 그래도 아주 드문 건 아니에요. 서울이나 도쿄의 야경은 야근이나 과로가 만들어낸 풍경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래서 싫어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저요? 저 같은 경우는… 비슷하기는 한데, 좀 다른 것 같아요. 뭐라고 하지? 약간 징그럽지 않아요? 한 눈에 보이는 광경에 수만 ...
"인간들 주말에 할 일도 어지간히 없나." H는 종이빨대를 신경질적으로 씹으며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그건 의미 없는 불평이었다. 토요일 스타벅스에 사람들이 미어터지는걸 모르고 나온 게 아니니까. 종강을 맞이하고 크리스마스를 지나, 연말을 맞이하기까지 H는 L과 함께 몇 번이고 홍대로 나왔다. 오늘 어디 갈래? 몰라. 재밌는데 있나. 그럼 그냥 홍대가지 뭐....
P가 다니는 회사의 사무실에는 차(茶)가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한 사람 때문이었다. 작년에 입사한,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 신입은 아니지만 아직 신입 같은 위치의 C가 거의 1년에 걸쳐 가져다 놓은 것들이었다. 녹차부터 홍차, 허브차에 이르기까지 C는 차라면 가리는 것 없이 좋아했다. 아침이면 C의 얼그레이 티백에서 나는 향기가 사무실을 가득 채우곤...
지금 사는 집이 이상하다. S는 그렇게 생각했다. S는 얼마 전에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한 집은 직장에서 좀 떨어진 동네에 있는 한 동짜리 아파트 월세였다. 그 전에 살던 빌라보다 월세는 비쌌지만, 대단지 아파트에 비하면야 못 낼 액수도 아니었다. 아파트라는 주거 환경이 주는 안정감도 좋았다. 오히려 한 동만 있는 만큼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
미란다는 지난주에 부친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퇴근을 앞두고 있던 금요일 저녁, 가족들로부터 그가 눈을 감았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주말 동안 친구들과 그리니치로 다녀오려고 했던 미란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그날 밤 바로 켄터키의 루이빌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그리고 미란다가 친구들과의 여행을 위해 준비한 여행 가방은 그대로 장례식에 가기 위한 짐가방...
M은 미국에서 로드 트립을 해 보는 게 꿈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 네바다, 애리조나, 텍사스로 이어지는 사막과 황야를 차 하나에 의지해 여행하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진부한 옛날 버디무비처럼 함께할 누군가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델마와 루이스처럼. 길 한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모텔에서 맥주와 버팔로 윙을 먹으며 시시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하룻밤을 보낸...
"우리 집에 이런 컵이 있었나?" 주방 찬장을 뒤적이던 J가 컵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흰 바탕색에 마치 동물 캐릭터 같은 이목구비가 붙은 컵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D는 돌아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아니, 내가 산 게 아닌 물건이 있으니까 그렇지." "선물 받은 건 아니고?" "컵 선물은 받은 적 없어." 잘...
H는 겨우 지하철 막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놀다 보니 막차 시간이 코앞에 이른 줄도 몰랐다. 우연히 지하철역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H는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친구에게 다급히 작별 인사를 한 후 역사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때마침 문이 열려있던 지하철에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찬 바람이 매섭게도 부는 겨...
(구) Second Ezequ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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